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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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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의미, 신학 아닌 예술에서 찾으려는 이유…”

이대웅 기자 입력 : 2017.05.02 22:48

 

 

 

라영환 교수, 복음주의조직신학회서 ‘종교개혁과 예술’ 주제 발표


복음주의조직신학회 라영환
▲라영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학회 제공
종교개혁이 예술 분야에 끼친 영향, 그리고 예술 분야가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다. 라영환 교수(총신대)는 지난 4월 29일 안양대에서 열린 제33차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정기논문발표회에서 '종교개혁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라영환 교수는 "종교개혁가들은 예술, 특별히 시각예술 분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주장돼 왔다"며 "종교개혁 당시 예술은 이처럼 거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종교개혁의 기치가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라 교수는 "시각예술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부정적 입장은 중세 가톨릭의 종교적 형상과 이미지 사용과 남용에 기인한 것이었다"며 "특히 교회 안에서 형상과 이미지의 사용은 우상숭배와 직결된 문제였다. 교회 안에서 형상과 이미지의 사용이 가져올 문제들에 대한 지적은 계속됐지만, 중세 가톨릭은 그 위험보다 그것이 가져다 줄 이익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복음주의조직신학회
▲라영환 교수(가운데)가 발표하고 있다. ⓒ학회 제공
16세기에 일어난 성상 파괴운동은 예술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반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피테르 얀스 산레담(Peter Jansz Saenredam, 1597-1664)이 하를렘의 성 바보교회(St. Bavo in Haarlem) 내부 모습을 그린 연작 시리즈에서, 우리는 성상파괴 운동 후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부가 종세 가톨릭과 비교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볼 수 있다"며 "1566년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나기 전 성 바보교회 안에는 벽화들과 36개의 제단이 예배당 양쪽 통로에 있었지만, 성상 파괴운동으로 인해 예배당 내부 이미지들과 제단들이 다 제거되고 어떤 장식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라영환 교수는 "그러나 성상 파괴운동만으로 종교개혁가들이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루터의 경우 여전히 성상 숭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이미지의 적절한 사용은 신앙에 유익이 될 수 있다고 봤다"며 "당시 유럽의 대중 가운데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그림은 중요한 의사소통 도구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종교개혁이 빠른 속도로 대중에게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판화와 같은 시각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Runewaldt, 1470-1528), 루카스 판 라이덴(Lucasvan Leyden, 1489-1533),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nach, 1472-1553)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등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화가들은 중세의 전통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종교개혁가들의 기치를 대중에게 각인 시키는 그림을 그렸다"고 전했다. 

 

복음주의조직신학회 라영환
▲라영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학회 제공
라 교수는 "종교개혁과 예술과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있어 16-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을 고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종교개혁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예술이 찬란하게 꽃이 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질문했다.

 

16세기에 시작된 네덜란드 미술은 17세기에 와서 만개했고, 17세기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였다. 그는 "당시 프로테스탄트 예술은 철저하게 중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며 "미술은 가톨릭교회에 있어 선행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인간은 교회법에 따른 7가지 자비로운 행위뿐 아니라 재정적으로 교회를 지원하거나 신앙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미술품들을 의뢰하는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답했다. 

라 교수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로움이 이미지와 같은 외적 수단을 통한 중보를 거부했다. 의로움은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이라며 "교회를 장식하기 위하거나 개인의 영성을 고취하기 위한 그림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했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받아들였던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부 유럽 화가들은 이미지의 왜곡이 가져올 문제들을 직시하면서, 교회 안에서의 이미지 사용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고 설명했다. 종교개혁 진영과 가톨릭 진영 사이의 이 같은 차이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원인은 신학에 있었다는 것.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적 사상은 '칼빈주의'였다. 그는 "철저히 중세교회의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교회를 바로잡으려 했던 칼빈에게 있어 예술은 주요한 신학적 담론이 아니었고,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의 현존이나 어떤 영적 체험을 느끼기 위한 그림이나 조각물들은 교회에서 없어져야 했다"며 "하지만 칼빈이 예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칼빈은 세속적인 영역에서의 예술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뒀고, 예술은 하나님의 은사이므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봤다"고 전했다. 

라 교수는 "칼빈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 가시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시도들을 금했지만, 가시적 세상을 그리는 것조차 금한 것은 아니었다"며 "이 시기 네덜란드 예술가들이 칼빈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문헌적 증거들을 찾기는 쉽지 않으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이 강력한 칼빈주의 전통이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렇듯 변화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발했는데, 풍경화와 풍속화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풍경화에 대해 라 교수는 "종교개혁의 열매"라며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가톨릭이 지배적이던 플랑드르, 이태리, 스페인,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작품들과 달랐고, 이러한 차이는 풍경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정리했다. 

 

네덜란드 풍경화 얀 반 호이엔 ‘강변의 풍차’
▲얀 반 호이엔의 ‘강변의 풍차’. 드넓은 하늘이 특징이다.
그는 "이 시기 네덜란드의 풍경화는 중세의 미학처럼 자연을 이상화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가능하면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려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곳으로 묘사했다"며 대표적으로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1956-1656)의 '강변의 풍차'를 비롯한 작품들과 야곱 반 루이스달(Jacob van Ruisdael, 1628-1682)의 '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 '유대인의 묘지', '나무를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 등을 제시했다.

 

라 교수는 "이 시기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은 조화와 비례, 균제와 질서 등을 추구했던 중세와 르네상스, 플랑드르 미술과 달리 '손상된 미(broken beauty)', '결핍된 자연'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세상과 인간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하늘"이라며 "호이엔은 하늘을 화면의 2/3 이상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렸고, 이것은 이 시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했다. 

또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교회 내부를 치장하기 위한 그림이나 개인의 경건성을 고양시키기 위한 그림 보다,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세계관을 풍경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담아냈다"며 "이 시기 화가들은 마치 세속적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고자 했던 개혁가들과 같이 세속적 이미지를 통하여 거룩을 이야기하고자 했고, 풍경화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중세의 이원론적 시각을 거부하고 세상 속에 거룩을 심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정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네덜란드 풍경화 야곱 반 루이스달 ‘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
▲야곱 반 루이스달의 ‘세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
'풍속화'에 대해선 "종교개혁의 적용"이라고 정의했다.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된 네덜란드 북부 지역의 중심 세력은 상업 활동에 기초한 신흥 부르주아(bourgeois)였는데, 과거 미술품의 주요 구매자였던 교회와 귀족의 위치를 이들이 대신하게 됐다.

 

라영환 교수는 "구매자의 변화는 예술의 흐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꿔 놓았는데, 종교화나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서사적 그림이 아닌, 자신들의 집에 장식할 수 있고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작은 그림들을 선호했다"며 "네덜란드에서 풍경화와 풍속화 그리고 정물화가 발달된 것은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변화와 구매자 층 변화라는 경제적 요인들이 합쳐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라 교수는 "이 시기 화가들은 후견인의 주문에 의해 그림을 그렸던 이전 세기와 달리 직접 제작한 그림을 갖고 거리로 나가야 했는데, 이러한 변화 속에서 네덜란드 화가들이 발견한 것이 '일상성(日常性)'"이라며 "개인의 경건을 고양시키거나 교리의 선포와 같은 이전 세기의 그림들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감소한 반면, 일상의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체해 화가들은 자신들 주위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화폭에 담았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과장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고 했다. 

<서양미술사>를 쓴 곰브리치(E. H. Gombrich)는 네덜란드 화가들이 이 시기 작품 속에서 서민이나 농부를 소재로 한 것이 칼빈주의 영향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에릭 라르센(Erik Larsen)역시 막스 베버(Max Weber)가 밝혔던 칼빈주의의 특징인 '세속적 금욕주의와 직업적 소명설'이 17세기 네덜란드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세이빙 다빈치>의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도 이 시기 화가들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은 것에 대해 "일상생활 영성, 즉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종교개혁 사상의 반영"이라고 봤다. 

 

네덜란드 풍속화 페르미어 ‘우유 따르는 하녀’
▲페르미어의 ‘우유 따르는 하녀’.
이들은 특히 당시 화가 페르미어(Johannes Vermeer)의 작품 '우유 따르는 하녀'를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당시 네덜란드 풍속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영웅 대신 평범한 사람을 소재로 삼고, 그리 고귀한 일이 아닌데도 조심스럽게 우유를 따르고 있다. 그는 "삶의 현장이 부르심의 현장이라는 종교개혁 정신과 부합하는 것"이라며 "유사한 시기 플랑드르나 가톨릭 진영에서 제작된 작품들에서는 찾기 쉽지 않은 장면"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헨드릭 아버캄프(Hendrick Avercamp)의 '도시 근처의 얼음 위의 풍경', 파울루스 포터(Paulus Potter)의 '말 발굽 만드는 가게', 이삭 반 오스타드(Isack van Ostade)의 '여인숙 앞의 노동자', 코넬리우스 베하(Cornelis Bega)의 '연금술사', 피터 더 호크(Pieter de Hooch)의 '뜰 안의 여인과 아이', 헨드릭 더 브루헨(Hendrick ter Brugghen)의 '백파이퍼' 등의 작품들이 이러한 특성을 보인다. 

라영환 교수는 "이 시기에도 렘브란트의 작품들처럼 성경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들도 있지만, 이들의 그림은 중세 가톨릭 전통의 그림과 달리 영적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혹은 개인의 경건을 위한 그림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며 "그 표현 방식도 바로크나 플랑드르처럼 과장되게 묘사하지 않고, 성경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표현했다"고 밝혔다. 

 

네덜란드 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렘브란트가 그린 ‘나사로의 부활’. 빛이 왼쪽의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
성경을 소재로 했지만, 메시지도 달랐다. 그는 "대표적인 예가 '나사로의 부활'로, 흥미로운 점은 빛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님이나 나사로가 아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라며 "렘브란트는 이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의 반응'을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가들의 '믿음에 의한 칭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결론에서 라영환 교수는 "강력한 칼빈주의적 전통이 자리잡았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예술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며 "화가들은 풍경화와 풍속화, 초상화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이어갔고, 그 재능 속에서 소명을 발견했다. 이들에게 있어 소명은 자신들의 재능으로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했다. 

라 교수는 "물론 이 시대 네덜란드 화가들이 중세에 대한 신학적 반성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 시기의 모든 작품들이 종교개혁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며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가톨릭 진영과 구별되는 네덜란드적인 것이 있었고, 화가들이 적응했던 시대 변화의 기저에 종교개혁이라는 신학적 요인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복음주의조직신학회
▲학회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학회 제공
그는 "종교개혁 하면 우리는 루터와 칼빈 같은 신학자들을 떠올리지만, 종교개혁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종교개혁 사상을 적극 받아들였던 일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예술가들도 그 중 한 무리들이었다"며 "종교개혁의 의미를 신학이 아닌 예술에서 찾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은 종교가 아닌 삶의 개혁, 아니 세계관의 개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자들이 낳았던 종교개혁이라는 알을 적극적으로 품었던 일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한국교회를 위한 종교개혁’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정기논문발표회에서는 권호덕 박사(전 서울성경신대 총장)가 '루터의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가 '종교개혁 정신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각각 기조강연, 조영호 박사(안양대)가 '선행의 윤리와 타자의 윤리', 현재규 박사(장신대)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성령론'을 각각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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